May 27th, 2006 at 10:55 pm
(Nec spe nec metu)
그러니까 이것은 이득상환청구권 성립이나 부동산 소유권 취득 시효의 소멸 따위가 아닌, 나라는 인간의 대갈통 속 대뇌의 주름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어떤 화학 작용의 잔해들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한 달 전 쯤 상계동으로 방을 옮기면서 그간 모아뒀던 이런 저런 자료들을 많이 내다 버렸다. 어떤 일에 대한 직접적인 추억이 되지 못하는 종이뭉치들, 예를 들자면 제2대학 교안이라든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자료 같은 것들, 단행본으로 묶이지 못할 정도의 질을 보유한 인쇄물을 거의 다 폐품 속에 던져 버렸다. 고향에서 옮겨 온 원목으로 짜여진 책장 두 개에는 지난 4년 동안 사서 재어 놓은 책들만 꽂아 놓아도 빈 공간이 남아 나지를 않았다. 그래도 여적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라면 지금껏 버렸던 다른 글들보다는 소유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텐데, 그 가치의 기준은 해가 거듭날 수록 자꾸 엄격해진다. 올 사월에는 내 지식 수준에 일대 변혁을 가져 왔던 테마 강의의 핸드아웃도 포기했다. 이제 보니 더 이상 지적 감흥이 남아 있지 않더라.
그래도 국토대장정 자료집 같은 건 남겨 두었다. 당시에 거기다 끄적인 글이 좀 있어서다. 그런 까닭에 해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급우들끼리 크리스마스 카드를 교환해 대던 시절부터 받은 서간 따위도 버리지 못하였다. 고등학교, 중학교, 국민학교 순으로 기억을 소급해 갈 수록 서신의 송신자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더니, 급기야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0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간판을 갈아 치운 지가 그 정도 될 것이다. 그 시절 같은 반이었다던 여자 애는 작년에 싸이월드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서 미니홈피에 글을 남겼는데, 나는 도무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물며 그보다 몇 년 전의 아이들이야 기억하면 도리어 이상할 일이다.
보름 전 쯤 신촌에서 고등학교 재경 동창회가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과 말을 섞으며 너는 요새 무엇을 하고 사느냐고 묻는 일이 몹시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자리에 계속 나가다 보면 장년이 되어 마침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군상들이 될 확률이 높은 탓이다. 같이 동문회에 가자고 나를 부추기던 김 군에게 그런 말을 하니 혀를 찼지만, 나는 내가 존경하는 서 선생님처럼 회비만 내고 모임에 안 나갈 정도의 도량을 갖추지는 못할 것이므로, 미리 선을 그어 두려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생전 연락도 없다가 결혼식 때나 되어 연락을 돌리는 파렴치한 짓은 결코 하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사법시험에 합격한다면, 나는 셀룰러 폰을 새로 사서 번호를 바꿀 작정이다.
10년이 또 지나면 내 기억 속에는 누가 사라지고 누가 남아 있을까. 고등학교 아해들도 이제 슬슬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려나. 언젠가 또 한 명의 김 군은 이미 고등학교 동기들이 기억에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10년이면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나이다. 벌써 대뇌의 능력은 감퇴하기 시작하였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애당초 대학에서는 그리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았기에, 그렇게 잊혀질 사람의 숫자가 애당초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어음수표법 발표를 준비하면서, 어제 저녁 같은 조원 세 명이서 미스터 왕에서 식사를 하였다. 값은 01 선배가 치렀다. 04 후배는 같은 학회였으나 이번 학기에 처음 통성명하였다. 01 선배는 빠른 83이라 나와 생일이 두 달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내게 반말과 존대를 번갈아 사용하였고 나도 가끔 그를 형으로 호칭하다 다시 선배로 바꿔 불렀다. 그러고보면 나보다 만 일개월 빨리 태어났으면서도 대학을 한 해 늦게 입학하였다는 이유로 나를 선배로 불러야 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처럼 같은 재학생들끼리라면 서로 김형, 이형 이렇게 부르던 시절이 그립다. 아니, 그보다는 벽초 홍명희의 경우처럼 스무살 차이 나는 부자가 모두 벗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던 20세기 초반이 더 그립다. 벽초 선생의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던 두령들이 제 괴수를 꺽정이 언니로 부르던 시대는 경외로와 아득하다. 짬밥 순서로 깍듯이 대접하는 시궁창 같은 병영 문화가 대학 문화에 고스란히 옮겨 온 이 시대를 저주한다. 허나 나는 현재의 관습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짓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규범적 인간이라 감히 선배들에게 말을 놓으려는 시도는 하지 못한다. 후배들에게 말을 놓으라는 이야기를 못할 바는 없겠지만 그럴 이야기를 할만큼 친밀한 후배는 아직 내게 없다.
어찌됐건 그 01 선배는 한 학기를 오직 책을 읽기 위해 휴학하였던 경력이 있었고 김용의 소설을 좋아하는 점이 나와 비슷하였다. 그날 화제에 올랐던 책들은 대체로 소시적에 읽었던 책들이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열심히 읽은 책들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선배를 어떠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인지 판정하려 드는 짓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막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방학이 되어 여유가 생기면 다시 또 만나기로 하고 오늘 오전 열시 이십분에 헤어졌다.
그러고보면 나라는 인간은 스쳐 지나간 타인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남아 있을까. 진실로 그간 살아오면서 그다지 관심을 가져 오지 않은 부분이다. 그래서 나란 사람은 무뚝뚝하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일 수가 있을 것이다. 남이 나를 제 정신 속에서 어찌 여기든 무슨 상관이랴. 살아 가다 한 번 쯤 기억 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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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8th, 2006 at 10:51 pm
(Nec spe nec metu)
같은 방에서 함께 기거했던 마지막 친구는 만화를 무척 즐겨 보았다. 단행본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못해 잡지에 연재되는 내용을 챙겨 보았고, 인터넷에 만화를 올리던 작가들의 홈페이지를 즐겨 찾고는 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둘 있는데 한 사람은 지금 스포츠조선에 연재 1000회를 돌파한 ‘트라우마’의 곽백수이고 다른 한 사람이 강풀이었다. 신문과 포털에 만화를 연재하게 되면서 그들의 홈페이지에는 더이상 만화가 잘 올라오지 않았고, 어느새부터인가 매일 점심 식사 후 포만감에 겨운 시간 동안 인터넷에 연재되는 각종 웹툰들을 일일이 확인해 보는 일이 일상 속에 깊숙히 자리 잡았다.
도서대여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만화 출판업은 큰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다 인터넷의 발달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와중에 일찍부터 인터넷에다 자신의 만화를 직접 공개하는 만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강풀이었다. 여기 저기 잡다한 매체에 기고한 만화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나마 스포츠 투데이에 연재하는 ‘일쌍다반사’가 유명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실제로 겪은 황당한 경험들을 각색한 것으로 똥과 토사 같은 더러운 소재가 단골로 등장하였다. 그래도 꽤 재미가 있어, 어쩌다 연예인들이 한 데 모여 수다를 떠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거기서 어떤 남자 연예인이 강풀의 만화에 등장했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겪었던 일화처럼 꾸며대는 꼴을 목도하기도 했다.
천년만년 똥 이야기만 할 것 같던 강풀을 세상에 널리 알려진 첫 작품은 ‘순정만화’였다. 띠동갑 연인을 중심으로 주변의 이야기까지 치밀하고 세심하게 묘사하는 그의 이야기 솜씨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여태껏 무료로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만화는 주로 스포츠 일간지에 연재되며 반전을 묘미로 삼는 단말적인 유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독자들의 대대적인 반향을 이끌어 낸 첫 인터넷 장편 만화가 강풀의 순정만화였다. 그 후 포털 사이트 다음에 계속 연재되는 ‘아파트’, ‘바보’, ‘타이밍’은 단 한 번도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모든 만화의 영화 판권 계약이 체결되는 기염을 토했다. 실로 강풀이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 내는 힘은 가공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허나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도 인정한 작화력이다. 모름지기 만화가라면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사진을 그림으로 겨우 겨우 옮기는 작업은 애처로워 보였다. 이런 면에서 강풀과 대조되는 작가가 양영순이다. 누들누들과 아색기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처음 시도한 장편 ‘1001′에서 드러난 그의 그림 그리는 솜씨는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또 양영순의 기발한 상상력은 장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듯했으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떨어졌다. 강풀은 한 작품을 그리기 전에 스토리를 모두 구상해 둔다고 했는데 양영순은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짜내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1001′의 다소 허탈한 결말을 보고 생각했다. 강풀의 서사 구성력과 양영순의 상상력 및 작화력이 결합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탄생할까.
정말로 대단하다는 찬사를 받을 만한 만화가 이미 세상에 나타냈으니, 그것은 바로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대중에게 널리 읽힐만한 만화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작가다. 태어나서 가장 말랑말랑한 내용을 다룬 만화라는 ‘위대한 캣츠비’는 인터넷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극치를 모두 보여 주었다. 화려한 색감, 빼어난 연출로 무엇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이 만화를 보니 이제 이 경지를 뛰어 넘을만한 작품을 보기 쉽지 않으리라 예감했다.
작가의 건강 문제로 연재가 불규칙해 많은 원망을 듣지만 개인적으로 정연식의 ‘달빛 구두’를 무척 좋아한다. 그림 솜씨가 입이 딱 벌어지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잔잔한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7~8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숨 막히는 공안 정국이 직간접적으로 만화 속에 묻어나는 장면들을 보고 슬쩍 슈피겔만의 ‘쥐’나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문득 강풀은 왜 과거의 현실을 다룬 만화를 그리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최초의 동기는 박재동의 만평을 보고 받은 충격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가 전교조와 여타 사회단체 회지에 그려 왔던 만평들을 알고 있다.
2006년 봄, 강풀은 침묵을 깨트렸다. ‘26년’이란 제목으로 80년 5월 광주를 다룬다고 했다. 5월 지방 선거를 앞둔 프로파간다라는 의견을 읽었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지금이 아니라도 그 소재로 만화를 그릴 수 있는데 굳이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은 광주 학살의 주범의 계통을 잇는 정당을 심판하겠다는 논리로 연결될 만하였다. 허나 나는 강풀이 ‘26년’으로 지방선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이미 2006년의 대한민국은 그런 선동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하기 전에 이러한 만화가 나왔으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만 97년 대선 때는 인터넷의 사회적 비중이 극히 미미하였다.
역사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책임자의 사과가 어쩌고, 보상이 저쩌고 떠드는 문제보다 이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문제가 훨씬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 내는 기제가 언론과 교과서고 여기에는 특정 사건들을 가능하면 가타부타 무시하려는 헤게모니가 여전히 강력하게 군림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기는커녕, 정치적인 것은 더러운 것으로 각인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 어떻게든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일전에 탄핵 사건 때 강풀은 탄핵을 반대하는 만화를 그렸다가 이런 정치색 묻어나는 만화는 지양해 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걸로 안다. 그가 어떻게 펜을 잡게 되었는지 모르는 수많은 새로운 팬들 중 많은 이들의 생각이 그러할 것이다.
이제 4편의 장편을 성공적으로 인터넷 포털에 안착시킨 영향력 있는 만화가가 된 강풀이 그리는 5월 광주의 기억은 반향이 상당하리라 짐작된다. 특히 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배우지 못하는 어린 세대들에게 그런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은 의미가 깊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혁명이었다며 흰소리를 떠벌이는 종자들이 남아 있는 세상에서, 386세대 정치인도 진보적 지식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강 작가가 해내리라 믿는다. 설득력 있게 잘 짜인 한 편의 만화는 말과 글보다 더 사람들에게 쉽고 즉각적으로 다가설 수 있으니까. 강도영, 그는 인터넷 시대에 처음 적응한 1세대 만화가이자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 만화가로 남을 것이다. ‘26년’이 강철 풀잎이란 이름에 정말로 어울리는 작품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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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6th, 2006 at 11:56 pm
(Verba volant, scripta manent)
* 이 글은 2006년 5월 15일 고려대에서 있었던 김규항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봉건제의 예속을 끊어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자유가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은 부유할 수 있는 자유와 더불어 가난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주었다. 비슷한 논리로, 70년대 신자유주의가 대두할 때 한국은 강력한 군사 파시즘 국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시키려면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 잡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에서 87년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얻어 낸 결과는 신자유주의화다.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훼하려는 뜻이 아니다. 문민정부가 세계화는 좋은 것이라 부르짖었을 때 경계했어야 하는데, 진보 진영은 동구권 붕괴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때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학자에 따라 아직 완성되어 가는 중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회가 되었다. 이는 고단하고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월드컵이나 신형 핸드폰, 자동차 같은 것들이다.
2004년의 탄핵은 이러한 상황을 은폐하는 대형 퍼포먼스였다. 한국 사람들은 군사 파시즘에 대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어서,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구도를 재현하여 ‘그들’이 돌아온다고 선동하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다. 북한이 이제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듯이 수구 세력이 역사를 퇴행시킬 능력은 없다. 지금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세력은 개혁 우파다. 조갑제와 지만원의 선동은 미학적으로 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극우 세력은 이제 사회의 한 구획으로 모이고 있기 때문에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선풍기의 전원을 껐을 때 날개가 당장에 멈춰 서지는 않는다.
다만 월드컵과 황우석처럼 국가주의가 판치는 현상은 아직 남아 있다. 만약 유럽에서 한국처럼 TV 광고에 국기가 휘날리며 애국심에 기대어 상품을 판다면 굉장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16세기에 한 스페인 선교사는 인디언들도 유럽인과 똑같은 사람이며 오래 전부터 그들의 방식으로 오히려 백인들보다 하느님과 더 잘 대화해 왔다고 주장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인디언을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식민지 개척의 정당성을 잃기 때문에 그 선교사는 진실 따위 때문에 국익을 저버린 놈이 되었다.
지금 평택은 광주와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을 것이다. 평택 문제의 본질은 미국의 동북아질서 재편이다.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전력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기지를 확장 이전하면서 미군의 성격이 공격적으로 변환되고 있다. 미국은 초국적 기업의 본거지이고, 미국의 이러한 전략 수정은 신자유주의의 일환이다.
80년 광주 항쟁의 경험을 통해 진보 운동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그전까지 진보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은 국가에 노출되면 무조건 간첩으로 몰렸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도 스스로 반공주의자라고 실제로 믿었다. 80년 이전 운동의 목표는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는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국 근처로 온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미국이 시민들을 도우러 온다고 착각했다. 미국은 한국의 신군부를 안정화시키려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몇 달 사이에 운동은 더 급진적으로 변하였다. 80년에서 87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운동의 목표는 민주화가 아니라 혁명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순수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하였으나 실제 목표는 체제 전복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생각이 깊고 진지한 사람은 모두 사회주의자였다. 전쟁이 끝나고 문인들은 술판에서 쭉정이만 남고 알맹이는 없어졌다며 자조했다 한다. 그 후 광주 항쟁 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80년대 중반에는 레닌 · 스탈린주의자까지 출현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돈이 있으면 사랑과 존경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돈 없고 정직한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수구 세력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는 기만적인 말들을 하고 있다. 정권은 극단적 우파에서 보기 좋은 우파로 넘어 갔을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네티즌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들이 떠드는 내용은 고작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체제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꼭두각시 노릇이다.
Q. 남미 정치와 유럽의 사민주의에 대하여.
A. 지금 남미는 신자유주의를 거스르는 아름다운 모델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맹목적인 추종을 전환시켜야 한다. 사민주의는 절충된 상태다. 혁명은 안 할 테니까 다른 것들을 좀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지구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잘 사는 사회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마지막이라고 본다면 문제가 있다. 거기에도 신분과 소외와 차별과 억압은 존재한다.
Q. 자본주의의 장점에 대하여.
허접한 공화정보다 유능한 왕정이, 위선적 여성주의자보다 따뜻한 마초가 인간을 단기적으로 좀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 수는 있듯이 자본주의에도 장점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을 강요하는 체제이고 경쟁에서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Q. 평택의 공권력에 대항하는 폭력에 대하여.
A. 세상에 폭력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국가도 지금 어쩔 수 없이 대항 폭력을 쓴다고 생각한다. 부시도 미국의 전쟁이 테러에 대항하는 폭력이라고 여긴다. 부시와 라덴은 모두 똑같이 폭력을 쓰는 인간이라고 등치시키는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진정성이 달라진다.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처럼 폭력의 현장에서 피해를 겪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존중하겠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공부방에 앉아 책이나 뒤적거리면서 하는 말은 현장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Q.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하여.
A. 우선 우리는 북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선별된 정보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북한 인민들이 자기네 정치 지도부에 대한 윤리적 신뢰는 매우 높다. 그것을 세뇌라고 하기도 하는데 요즘처럼 외부인이 자주 들락거리는데도 반세기 동안 세뇌당하고만 있다고 여기기는 힘들다. 북한을 딱하게 여기기 전에 우리 사회를 보자.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가 되었고 점심을 못 먹는 아이들이 50만 명 존재한다. 남한에 자유권이 더 잘 보장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북한에는 사회권이 더 잘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북한에서 양육은 국가가 모두 책임진다. 북한 인권에 문제가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농담조로) 예전에 이런 말을 했더니 “당신 PD인 줄 알았더니 NL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Q. 종파주의에 대하여.
A. 홍세화씨는 자신이 사민주의자라고 하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완전한 사회주의자도 전술적인 선택은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신념과 원칙이다. 한국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좌파들끼리라도 똘똘 뭉쳐야 된다는 주장 속에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를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진정한 연대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전술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이 사민주의인 사람과 사회주의자로서 사민주의적 선택을 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종파주의란 자기 조직 지분을 위해 혁명을 거스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서로 다른 종류의 생각은 만 가지가 되더라도 좋다고 본다.
Q.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A. 학생들에게 받는 심각한 질문 중에 교회 문제가 가장 많다. 한국 교회는 상점이다. 작은 교회는 가게고 큰 교회는 기업이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생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야훼가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예수가 죽는 순간 지성소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인간과 신이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목사는 신부처럼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성직이 아니라 직업에 지나지 않는데 한국 목사들은 마치 자신이 그 사이의 중개자처럼 행세한다. 교회개혁운동은 한국 교회를 교회라는 전제 아래 펼쳐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나는 중2때 부모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 늘 교회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그러다 한신대에 입학해서 예수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80년대 전의 운동은 진보적 기독교 운동이 주도해 왔고, 그 분들이 예수처럼 싸우다 죽자고 말하니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겠는가. 나는 맑스보다 예수가 더 큰 충격이었다.
Q.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진보적인 생각을 감염시킬 수 있을까.
A. 교회 문제 다음으로 많은 학생들의 심각한 질문이다. 내가 낙관적이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 세상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보여주려는 데 있지 않고 이 세상이 얼마나 은폐되어 있는지 말하려는 데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갖는 욕망의 부질없는 총결정체는 아이 교육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아이들을 상품으로 키우고 있다. 내 주변의 진보연하는 사람도 늦어도 아이가 6학년 정도 되면 변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아이가 주변 환경 때문에 변한다. 지금 진보의 흐름이 위기를 맞고 있다.
운동은 이미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양쪽 사이에 있는 부유층과 회의층을 끌어들여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얼개를 잡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할 게 아니라, 애정을 갖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감염시키자.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이런 얘기로 열을 올리는 방식은 별로 효과가 없다. 살다 보면 삶에서 진지한 국면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자본주의는 결코 이성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인간의 말초 신경을 통해 세련되게 침투하는데, 구호나 선전으로 대중이 선동되지 않는다. 결국 누가 더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지 보여주는 삶의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대학 생활 수준에서 드러나기는 힘들다. 학생운동은 망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학생운동은 오랫동안 진보의 우물로 특별한 성격을 지녀왔다. 미국과 일본의 학생운동도 우리처럼 급진적으로 되지는 않았다. 학생운동이 쇠락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잘되면 좋다. 솔직히 대학생들은 지금 생각을 졸업해서 견지하기나 했으면 좋겠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학생 때 100명이었다가 세월이 흐른 뒤 0명인 것보다 2~3명이 남아 있는 게 발전 아니겠는가.
Q.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A. 가난에는 자발적 가난과 구조적 가난이 있다. 자발적 가난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태이다. 하지만 그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에게도 상층과 중층 계급의 지원자가 있었다. ‘고래가 그랬어’도 망할 뻔 했는데 건전한 부자 1~2명의 도움으로 회생했는데, 그 후로 생각이 조금 변했다.
Q.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권하고 싶은 책을 추천해 달라.
A. 김수영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한국 지식인 가운데 자기와 분리된 사회의 얘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 자기 일상을 이야기한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신동엽과, 요즘의 글을 읽지는 않지만 김지하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가복음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우리들의 하느님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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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5th, 2006 at 1:13 am
(Nec spe nec metu)
수락산, 마들, 노원, 중계, 하계, 공릉… 차량 내 인간 밀도는 역을 하나 지날 때마다 높아져 갔고, 마침내 사람 사이의 공간이 소멸하여 책읽기를 포기하여야 했다. 책갈피를 끼울 여유가 없어 손가락으로 읽던 부분을 가늠하였다. 환승역 태릉에 도착하자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무리들에 섞여 6호선 플랫폼으로 옮겨갔다. 6-1까지 걸은 뒤 멈춰 서서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든다. 멀리서 지하철이 역으로 진입하는 소음이 들린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밀쳐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뒤를 돌아 봤다. 작달만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월곡역에서 제법 많은 승객이 하차하자 근처의 어린 학생들이 놀라면서 재잘거렸다.
“여기 왜 이렇게 많이 내려?”
“음, 이 다음에 고려대역이잖아.”
월곡역의 다른 이름은 동덕여대역이다.
종합생활관 밑을 지나가는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은 꽤 길다. 햇살이 눈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다. 암실에서 자란 콩나물처럼 비쩍 마른 몸을 힘겹게 움직여 시루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오늘도 1급 콩나물이 되려고 일찌감치 학교에 나온 콩나물 대가리들의 색깔은 대체로 시꺼멓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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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3rd, 2006 at 11:09 pm
(Nec spe nec metu)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 박사 수여식을 막았던 학생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 교수를 감금했다는 죄목으로 출교당한 학생들은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고 학교 당국도 징계 발표 이후 철저한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선 학내 학생들의 여론부터 그다지 좋지 못하다. 운동권의 성지였던 이 학교에도 2002년에는 비운동권 학생회가 들어섰던 전력이 있듯이, 학생운동세력에 대한 반감은 학생들 사이에 뿌리 깊게 내려앉았다. 학생운동가 출신의 386세대가 정치가로 변신하는 모습에 빗대어 학생 운동하는 놈들은 죄다 나중에 정치권에 빌붙으려고 경력 쌓고 있는 중이라며 비웃는 유형부터, 학생 운동하는 애들이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망신시킨다고 진심으로 믿는 무리들까지 불신의 양상도 가지가지다. 학생들은 보건대 통폐합 문제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 그 차가운 생각은 전문대와 4년제 대학은 격이 다르다는 심리에 근거하고 있을 터이다.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냉담하던 꼴과 흡사하다.
학교 바깥의 사람들도 학생들이 이건희 회장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는 삼성 그룹 회장이라는 한국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에게 몸으로 항의한 그들의 행동을 보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다. 이번에 학생들이 충돌한 대상은 ‘스승’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국가와 국민이 모두 똑같은 관계라는 전근대의 논리가 아직도 만연해있는 한국 사회에서 스승에게 맞대드는 것은 하나의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스승의 권위도 근대화가 진전되면서 많이 허물어졌기는 하다. 초중등교육 현장에서 땅에 추락한 교권이 새삼스러운가. 대량으로 교육이 공급되고 소비되는 사회에서 스승이라는 전통사회의 권위가 허물어지는 일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다. 모든 국민에게 의무교육을 시키기 위해 교사들을 양산하는 현대 사회에서, 안정적인 밥벌이 수단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들에게까지 스승으로서의 고매한 인격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교사의 능력은 인간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적절하게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교사 사회와는 달리 아직도 전근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선생 집단이 교수 사회다. 비합리적인 관행과 예우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지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사회적 권위는 그들의 가방끈이 길다는 이유로 여전히 견고하다.
고려대 당국은 바로 이 부분을 노렸다.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는 껍데기 같은 관념이 지금도 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여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정말로 감금이라 여겼다면 경찰에 신고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대치만 계속하던 교수들은 마침내 언론이 도착하자 적절한 그림을 만들었다.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차가운 복도에 방금 전까지 놓여있던 전열 기구는 사라져 보이지 않고, 교수들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둘러 쌓여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우리들은 너희들과 대화할 수 있다.” 보도가 나간다. 교수 감금 사태. 성명서가 나간다. 우리는 패륜적인 학생들의 행태에 통탄한다. 징계가 발표된다. 7명 출교, 5명 유기정학, 7명 견책. 학교의 이러한 조치는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 아래 진행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처하는 학생들은 지금 어떠한 모습을 보이고 있나. 부당한 징계 철회하라. 징계 받을 이유가 없다. 학우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죄인가. 모두 옳은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쌍팔년도가 아니다. 눈앞에 가시화된 국가의 억압에 저항하는 시기가 아니다. 자본의 통제는 날로 세련되어 가는데, 여기에 맞서는 자들의 전술은 왜 이리도 투박한가. 대중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이렇다. 아직도 극대주의의 태도로 순수하게 투쟁을 견지하면 언젠가 대중이 알아주리라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능하다.
지금 이들이 이렇게 아둔한 방법을 고집하다 끝내 꺾여 나가면 더 이상 한국의 대학에서 자치를 기대할 수 없다. 학생들이 학교에 무엇을 요구하든 학교는 학칙에 의거하여 학생들을 위협할 것이다. 벌써 다른 대학들이 고려대의 조치를 흉내 내고 있다. 고대는 이건희 사태 이후 총학생회비를 등록금과 분리하여 납부하게끔 하더니 올해에는 학생들이 주최하는 새내기 배움터도 학교 주관의 오리엔테이션으로 대체하려 들었으며, 학생들이 강의실 등을 대여할 때 교수의 확인서를 첨부하게끔 하여 학교 시설 이용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조만간 이화여대처럼 학내에 대자보를 붙이려고 할 때마다 학교의 검인을 받게 될 때가 도래할 것이다.
자치는 왜 소중한가. 자치의 경험이 없는 자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가능성이 적다. 초중고교에서 학생 대표가 수행하는 기능은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린 학생들에게 학생회장 선거는 민주주의 제도 절차를 한 번 체험해보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고, 학생들의 대표는 교사들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여는 회의에서 논의되는 사항은 학생들의 삶에 일말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공교육 안에서 학생들은 자기네들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집행하고 평가해 보는 경험을 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 지시에만 따라야 한다. 이제 그러한 현실이 대학에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대학에서 자치를 경험하지 못하면 사회에 진출한 뒤 관리직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통제받는 삶만 누리게 된다.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 즘이면 이미 체제에 충실히 포섭당한 상태이다. 칼 폴라니는 시장 경제라는 악마의 맷돌에 대항하는 사회의 반격을 주문하였다. 자치의 경험 없이 이를 구성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길을 에둘러야 할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 젖어들면 자본의 철퇴가 자신의 밥그릇을 깨부수기 전까지 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때문에 비록 자치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의 숫자가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무의미하다 할 수 없다.
법정에서의 공방이 이 문제의 본질이 무례한 운동권 학생들에 있지 않고 학교와 학생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명확하게 드러내주지 않을까 서글픈 기대를 한다. 교수들을 감금한 사실은 형사 재판에서 다투고, 학교가 학생들을 쫓아낸 사실은 민사 법정에서 다투자. 학교가 학생들의 신분을 일방적으로 좌우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학교와 학생은 재학 계약을 맺는 것이고, 학칙이 이를 마음대로 종료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한쪽 당사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계약이다. 판사 영감 나리들이 학생들의 권익을 생각해 주시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학생이 학교에게 정당한 이익을 요구할 수 있는 상식적인 권리를 이처럼 허탈하게 침탈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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