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권태 : 로버트 실버버그의 『두개골의 서』

늙어 죽지 않는 존재는 거개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레스타트와 루이가 그랬고, 퇴마록에 등장하는 아하스 페르쯔에게 영생은 신이 내린 저주에 불과하다. 톨킨이 창조한 세계에서 죽음은 유일자 에루의 둘째 자손인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노화하지 않는 첫째 자손 요정은 인간의 운명을 부러워한다. 요정들은 설령 병이나 상처로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그 영혼은 불사의 땅에 위치하는 만도스의 정원에 모여 언젠가 유일자가 부르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간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육체를 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이란 단지 존재하기를 멈추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그래도 특정한 영역에 기약 없이 머물러야 하는 존재에게는 이 같은 소멸의 가능성조차 없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는 법이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두개골의 서에 나오는 네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일라이는 영생을 얻은 뒤 무엇을 할 지 상상한다. 십 년 정도는 재산을 축적하고, 십 년 정도는 여자를 탐하고, 이십 년 정도 명상을 하고, 팔 년 정도 몸을 단련하고, 십오 년 정도 음악에 몰두하고, 이십 년 정도 세계를 유랑하고, 삼십 년 정도 언어와 철학을 연구하고, 호모섹슈얼이 되어 보았다가, 화성에서 십이 년을 보내고, 문학에 이십 년을 투자하고, 라마승으로 십 년, 아일랜드 어부로 십 년, 미국 상원의원으로 십이 년, 과학에 사십 년을 매진한 뒤, 물질 투명화 전문가로 이십 년, 다물질 부상 연구가로 이십 년, 미래 예측가로 십여 년… 무한한 시간을 향유하는 존재는 그런 목표들을 언젠가는 달성하게 되고, 그렇게 지속되는 삶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은 설사 중간에 그 내용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지겹다. 한 없이 유지되는 삶은 시지프의 노동과 다를 게 없다. 차라리 프로메테우스의 수난이 덜 고통스럽다. 인류에게 불을 선물한 이는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의 형벌에서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영생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실버버그가 내린 대답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시간의 축 위에 선 자는 죽든지 말든지 삶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시간이 존재하는 않는 공간을 상상하기란 자본주의를 넘어선 세계를 꿈꾸는 일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이렇게 영생을 주제로 하는 소설의 장르를 SF로 분류할 수 있을까. Science Fiction을 공상과학소설이라 번역하는 우를 제외한다면, 과학소설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게 정답에 가깝지 않나 싶다.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할지라도, 영국의 어떤 평론가는 SF로 출판된 소설은 모두 SF라는 정의를 내리기도 했으니 작가나 출판사가 SF라고 말하는 소설을 굳이 SF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사실 소설의 장르를 가리는 일은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을 구별하는 전제에서 비롯할 텐데, 꾸며낸 이야기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간에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글은 크로노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잊힐 뿐이다. 디킨즈와 뒤마는 신문에 연재되지 않는 소설은 쓰지도 않았고, 악마와 지옥이 등장하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단테의 신곡을 읽는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날이 근시일 내에 오리라 전망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요컨대 재미없는 글은 읽히지 않고,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부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특정한 분야의 재미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개인마다 서로 다른 취향의 차이가 존재한다.

두개골의 서의 배경은 70년대 초반의 미국. 동부의 대학생 넷은 영생을 찾아 애리조나의 사막으로 떠난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여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어렸을 적 국정 교과서가 대뇌 속에 주입시킨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서 느꼈던 강렬한 심상 때문인지, 영생의 비밀은 어쩐지 사막과 꼭 잘 어울려 보인다. 1960년대 후반에 근대 세계로 편입된 대부분의 지역은 극심한 사회문화적인 홍역을 겪었다. 적군파, 전공투, 홍위병, 히피는 모두 그 시절의 자식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6~70년대는 근대에서 소외된 인간의 영성을 되찾자는 뉴에이지 운동이 서구를 풍미했던 시절인데,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영생의 비밀을 담지하는 사원에 도착한 뒤 겪는 명상과 요가, 방중술 따위의 수련 과정에 그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뉴에이지 사조의 일부인 신과학이라 불리는 초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성과 영생도 결국 과학의 범주에 묶여 들어 갈 것이고, 결국 이 소설도 과학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근거가 전혀 없는 셈은 아니다. 과학이 무엇이냐는 입장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뿐이다. 소설의 장르가 무엇이건 간에 두개골의 서는 일단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살아 남았고, 68혁명의 폭풍이 지나간 후의 미국 청춘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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