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生의 꿈
금요일 새벽을 중앙광장 열람실에서 보냈다. 비몽사몽 중에 9시 20분부터 치른 친족상속법 기말고사는 복학 후 보았던 시험 중에 최악이었다. 35점이 할당된 주관식 7문제 중에 4문제를 틀렸고, 20점이 할당된 객관식 30문제 중에 5문제를 틀렸다. 학점이 잘 나오면 C+이겠다. 민법은 5과목 모두 B 이상을 받을 수가 없었던 학부 생활이 되고 만 셈이다.
유니스토어에 가서 이상돈 교수의 법학입문을 한 권 사고 미아 큐리텔 서비스 센터로 갔는데 팬텍이 그 꼴이 났는지 전혀 몰랐기에 수유 스카이 서비스 센터까지 가서 휴대전화와 PC를 잇는 USB 케이블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1시. 속이 좋지 않아 인스턴트 깨죽을 한 그릇 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
건대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의 문자를 받고 잠에서 깼다. 이미 약속 시간인 5시였다. 자는 사이 왼발에 심하게 쥐가 나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정시에 온 사람은 한 사람이었고 6시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내가 올 때까지 당구를 치고 있었다. 한 게임이 끝나고 고깃집을 찾아 들어갔다. 오기로 하였던 나머지 한 명은 올 생각이 없는 듯 했고 만나봐야 여자 이야기만 하니 오지 않은 게 굳이 아쉽지는 않다고 나머지 친구들이 눙치며 말하였다. 오지 않은 친구는 내일부터 여자한테 쓴다고 진 빚을 갚으러 무주로 스키장 알바를 간다는 것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고기들을 2인분씩 세 번 주문해 먹고 바에 들어가서 병맥주와 나초를 시켰다. 먼저 온 친구는 대학원생이었고 늦게 온 친구는 샌프란시스코에 교환학생으로 다음 학기 동안 가 있는다고 하였다. 그는 용투사 출신이었는데 얼마 전 싱가폴 관광객들 열흘 가이드 하고 백 만원을 벌었다 하였다. 토익 점수를 묻는 말이 나왔는데 800점대 후반이라 하였다. 지난 11월 한 달 공부하고 두 번째 응시했던 시험의 점수를 방금 확인하였는데 830점이 나왔다. 어제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었던 내 점수는 태어나서 처음 쳐서 얻은 680점에 불과하였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나보다 영어 점수가 2~3점 잘 나왔다고, 졸업하기 전에 한 번은 나를 이겼다고 좋아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라 아주 조금 서글퍼졌다. 지금 보면 낯이 뜨거워지지만, 중학교 3년을 통틀어 내 영어 내신은 500여 명 가운데 1등이었다.
아까 식당에서 받은 안마소 명함을 꺼내들고 영업사원들과 법인카드와 북창동 같은 곳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한 녀석이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동안 만난 금호타이어의 레이싱 걸들 얘기를 해 주었다. 내년 1년 휴학 할 거면 3월까지 개겨 봐서 휴학 처리되기 전에 훈련 다녀오라는 방법을 노려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예비군 제도를 없애준다면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고 해도 찍겠다고 했더니 둘이서 입을 모아 민주노동당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학교의 운동권과 재단과 총장 이야기가 이어졌다. 경영대를 다니는 친구는 나와 같은 학교였다. 그는 어윤대가 한 번 더 했어야 했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 있던 양복 입은 아저씨들 둘이 입을 맞추는 광경을 일행 중 한 명이 목격하였다. 다른 한 명이 그 꼴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였다. 나는 역시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를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은 재두리미를 자기 논문 주제로 삼았다고 하는데, 요즘 매일같이 김포 한강 하구에 나간다고 하였다. 덩치가 큰 놈들이라 날아 오를 때까지 도약 거리가 필요해 150m 이상 다가가면 도망치고, 잠을 잘 때도 포획자의 접근을 쉽게 감지하려고 물가에서만 잠든다고 한다. 그렇게 예민한 학들도, 일본 어느 도시에서는 그 동네 인간들이 자기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손으로 만질 수까지 있어, 올 겨울에 그곳에 잠시 다녀올 계획이라 했다. 가끔 망원렌즈로 생태를 관찰하고 있을 때면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 오르는 장관을 찍겠답시고 차를 새때 가운데로 돌진시키는 잡것들이 있다는데, 한 번 그러고 나면 새들이 다시 돌아 오지 않아 하루를 공쳐 버리기 때문에 대판 싸우고 연구실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갑자기 백주년 기념관 옆에서 기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던 아가씨들과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던 남정네들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렸다.
나머지 한 명이 새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 보여 돈 버는 얘기로 넘어갔다. 아직도 부모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간은 나뿐이었다. 셋 다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두 명은 사범대를 다니고 있었다. 내 부모님은 또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자식 뒷바라지에 보내셔야 할까… 법무법인과 회계법인 따위에 근무하는 인간들의 연봉과 근로조건에 대해 들었던 풍문이 오갔다. 이공계 대학원과 인문계 대학원의 차이도 실감할 수 있었다. 조류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 권위자의 마지막 제자가 되어 용돈을 제법 받는다는 친구가 모자라는 술값을 대신 계산하였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하면서.
아마 또 1년은 지나야 한 자리에 모일 텐데 그때 난 아마 그런 모임에 나갈 처지가 못될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이런 자리에서 결혼과 소득과 부동산 같은 주제들을 이야기할 터이다. 그때까지 내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한 별다른 삶의 모습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다르게 살리라고 다시 또 다짐을 하면서, 술이 조금 오른 얼굴로 지하철 마지막 칸 벽에 기대어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읽으며 그런 마음을 약간이나마 달래 볼 뿐이었다.
아옌데의 마지막 말
피노체트가 죽었다. 내가 자주 들리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그가 살해한 아옌데가 더 회자되고 있다. 칠레 전투를 시간 내어 꼭 봐야 할텐데.. 아옌데가 흉탄에 숨지기 전에 남긴 라디오 연설을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촌스러운 전태일 대신 멋진 체를 존경하는 궁상과 같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대면한 적은 없지만 비슷한 이상을 공유한 자의 연대 의식에서 감정이 동요하였던 것이라면 좋겠다. 아래는 ‘밑에서 본 세상’에서 옮겨온 연설문 번역 전문이다.
*—–*
1973년 9월11일은 민주적인 절차로 당선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아메리카합중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의 쿠데타로 밀려나 숨진 날입니다. 그가 이날 아침 마지막으로 한 라디오 연설문을 옮겨다 놓습니다.
*—–*
마지막 말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확실히 이번이 제가 여러분들께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공군이 마가야네스 라디오의 안테나들을 폭격했습니다. 제 말들은 쓰라림이 아니라 실망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들의 맹세를 배반한 이들에게는 도덕적 처벌이 있을 겁니다. 칠레의 군인들, 이름뿐인 총사령관들, 스스로를 해군 사령관이라고 칭한 메리노 장군, 그리고 바로 어제 정부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고 스스로를 (준군사 경찰) 카라비네로스의 총장으로 임명한 비열한 장군 멘도사씨. 이런 상황에서 저에게 남은 건 오직 노동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사적 변천 과정에 처해서 저는 일생동안 인민들에게 충성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제가 수많은 칠레인들의 양심에 뿌린 씨앗이 영원히 시들어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무력이 있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회의 진행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인민들이 역사를 만듭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이 언제나 보여줬던 충실함 그리고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것만 했으며 정의에 대한 위대한 갈망의 해석자에 불과한 이에게 주셨던 신임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 제가 여러분께 연설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순간, 저는 여러분이 교훈을 잘 활용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외국 자본, 제국주의가, 반동세력과 함께, 군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전통을 깨뜨리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사실에서 말입니다. 이 전통은 슈나이더 장군이 가르친 것이고 아라야 사령관이 재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오늘날 자신들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지키려고 외국의 도움으로 권력을 다시 정복하려 하는 바로 그 사회 세력들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땅의 품위 있는 여성, 우리를 믿는 농부,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를 아는 어머니, 바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저는 칠레의 전문직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이점을 옹호하는 직능 결사체들, 최고급 결사체들이 지지하는 반란에 맞서 계속 애써온 애국적 전문직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젊은이들, 노래 부르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기쁨과 투쟁 정신을 보여준 그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칠레의 남성, 노동자, 농부, 지식인, 이미 이 나라에 파시즘이 나타나 여러 시간 지속되고 있는 탓에 학대당하게 될 그들에게 말합니다. 행동할 의무가 있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테러 공격, 다리 폭파, 철로 절단, 기름과 가스 수송관 파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심이 굳습니다. 역사가 그들을 심판할 겁니다.
확실히, 마가야네스 라디오는 침묵할 것이고, 제 목소리를 전하는 차분한 금속 기계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대단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겁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을 겁니다. 적어도 제 기억이, 조국에 충성한 위엄 있는 사람의 기억이 될 겁니다.
인민들은 스스로 방어해야 합니다만, 제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인민은 자신이 파괴되도록, 총알 세례를 받도록 놔둬서도 안됩니다만, 인민이 굴욕을 당할 수도 없습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반역이 지배하려고 하는 이 어둡고 모진 순간을 극복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리고 이 길로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이것이 적어도 중죄, 비겁, 반역을 처벌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칠레 산티아고
1973년 9월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