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化門 外出

반년 만에 광화문에 갔다. 그 사이 문을 연 듯한 ‘미로 스페이스’에서 <폭력의 역사>를 보았다. 영상 매체는 활자 매체가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공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은 국가에 의해 금지된 사적 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유하의 다음 영화는 어떤 폭력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국가 폭력을 다루면 딱 좋을 차례인데 실미도를 그가 맡았으면 퍽 재밌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화려한 휴가>를 가족끼리 보러 가자고 하면 아버지께서 동의하실까. 상업 영화는 혼자 보러 가기 아직 어색한데.

열아홉 살에 겪었던 집회에서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선로를 점거했던 투쟁이 없었더라면 지하철역마다 승강기가 설치될 수 있었을까. 사적 조직폭력을 제압해야 할 공적 조직폭력집단이 되려 그들과 연합한 꼴을 보기도 했다. 기소권을 독점한 지구 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기관은 저놈들을 절대로 법정으로 부르지 않으리라. 파업을 둘러싼 고종석과 진중권의 논쟁을 보면서 비로소 폭력을 학적으로 바라보아야겠다고 느꼈다. 아직 폭력은 권력의 기반이라는 뻔한 사실 외에는 딱히 명확하게 정리된 생각이 없다.

일행과 헤어지고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가까웠다. 예전 기억에 교보문고 영업시간이 8시 반 정도까지였는데 혹시나 싶어 가보니 10시에 문을 닫는다 했다. 한 시간 밖에 시간이 없다 보니 매대에 깔린 책들만 훑어 보다 왔다. 처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찾았을 때 한 층에 책이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산의 대형 서점인 동보서적과 영광도서는 몇 층에 걸쳐져 있었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에는 진열된 책들만 봐도 호기심이 일어 거의 다 뒤적거렸는데 더는 그런 책들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다. 공들여 읽을 책 목록이 작성된 상태라서 그런 걸까. 오히려 법학 일반이라 제목 붙은 서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요새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책을 기초법학, 논픽션, 픽션 이렇게 세 종류로 크게 나누어 번갈아가며 읽고 있는데 기초법학 책으로 이상돈 저 『법이론』과 『법사회학』을 모두 읽고 나면 양건 저 『법사회학』과 김정오 저 『한국의 법문화』를 읽어볼까 한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띠 종이에는 300만 고급 독자가 선택한 책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급 독자가 삼백만이라니 왠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조갑제닷컴 출판 『박정희』보다 웃기지는 않았다. 경향신문사에서 펴낸 진보 어쩌고 하는 책은 집어들었다가 놓고 말았다. 진보라는 단어에 대한 알레르기가 좀 심해진 것 같다. 프레시안의 『여럿이 함께』도 훑어 보았는데 그다지 끌리지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 두툼할 줄 알았더니 팸플릿 하나 분량. 문제는 분량이 아니라 가격. 그 얄팍한 걸 양장으로 만들어 만 원에 팔아먹다니! 나도 양장을 좋아하는 인간이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조금만 더 값이 쌌더라면 아마 구입해서 귀가할 마음이 동했을지도 모를 텐데.

마지막 헌법 개정 20주년이라 그런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책이 제법 많이 출판되었다.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를 조만간 읽어 볼 시평으로 골랐다.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는 일전에 한국 정치학계는 너무 민주주의에 집착한다면서 전통에 좀 관심을 두라는 소리를 내뱉더니 무슨 조선 군주 열전을 써대고 있더라. 그가 꼬집고 싶었을 최장집은 지금 로크나 몽테스키외의 권력 분립 이론이 그저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 정부에서 느꼈다고 하는데, 조선의 왕들의 행적을 들추어 보는 작업은 대한민국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일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그가 추천했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20세기 중반 한반도를 직접 체험한 미국인 저자가 당대 한국의 정치 현상을 해명하려는 틀을 전통에서부터 찾아왔을 따름이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다치바나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마저 읽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처럼 여기저기 기고한 글을 짜깁기한 책이었지만 유익한 정보가 꽤 많았다. 일본 교육 체계가 변하는 기조를 한국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제도 대부분이 일본에서 베낀 것이지만,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로스쿨도 일본이 하니까 따라가는 셈이고. 고용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정서나 배우면 좋겠는데, 그런 건 실패한 모델이라며 무시나 하니. 뇌과학의 중요성도 새삼 느꼈다. 달포 전 만났던 친구에게서 들었던 거울 신경의 발견은 몹시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신고전학파의 중요한 가정 하나가 실증적으로 부정되어 버린 셈 아닌가. 『어둠의 속도』에서 묘사되었던 자폐인의 행태도 즉시 이해가 되었고. 인지 과학에 대해서도 언젠가 공부를 좀 해야겠다.

무엇을 알고 싶은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대략 감을 잡은 지는 삼 년이 지났는데 정작 다른 일에 치여 제대로 시작을 못 했다. 2009년 여름엔 ‘근대’를 주제로 ‘공부’를 할 테다. 법도그마틱을 익히는 데 매진할 시간은 앞으로 2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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