歡送

어제는 살인을 했고 오늘은 강간을 했다. 내일은 절도를 할 차례다. 형법 각론을 학습하는 사람이 하는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소리. 앞으로 닷새면 기본강의는 끝나고 기출문제를 정리하게 된다. 사실 보름은 걸릴 듯. 그러면 남은 일주일 동안 선택과목을 한 번 보면 구월이다. 막판에 볼 수 있는 교재는 어차피 한 권이라 생각하니 객관식 판례집에 대한 욕심은 버릴 수 있다. 민법은 핵심정리만으로 많이 부족할 테니 권순한 객관식 판례집을 끝까지 안고 가야 하겠지. 요령 있게 밑줄 그으면 중복되는 내용 없이 빨리 훑어 볼 수 있게끔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형법 판례는 요론에 거의 망라되어 있다고 하지만, 헌법 판례는 정회철 기본강의만 봐서는 부족하다고들 한다. 판례 교재를 통해 전문을 한 번 통독해 두어야 불안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언제 시간을 뽑아낼 수 있을까. 추석 연휴에는 선택과목 문제집을 풀려고 하는데. 하루에 판례 몇 개, 이런 식으로 통학 시간에 짬짬이 봐서는 효율이 있을지. 아니면 남은 기간에 기계처럼 몰두해서 여유 시간을 확보하는 수가 있다. 일단 이쪽으로 노력해 보기로 한다.

지난 화요일에 신촌에서 H 선배의 환송회가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선배가 바로 다음에 도착해서 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연간 5만 달러가량의 비용을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6년 이상 걸릴 박사 과정.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럽다. 얼마 전 석사 논문을 소개하던 자리에 갔더라면 공부 내용에 대해서도 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약간 아쉽다. 형은 내게 꿈을 잊지 말고 관심을 놓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 말해주었다. 내 꿈은 무엇인가. 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체계적인 지적 훈육을 받아 보고 싶다. 한국 대학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외국에서도 밥학을 공부하겠다는데 돈을 대어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더라. 그저 충고대로 눈앞의 목표에만 파묻히지 않으려 할 뿐.

이제 출국하면 몇 년 동안 만나기 어려울 탓인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제 막 제대했다는 K는 서로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서먹하지 않아 좋다고 하였다. 가치관이 완전히 상반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더니, 자신이 투신했던 학생회가 군 복무 중 거의 무너진 모습을 보니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는 왠지 불편하다는 말을 꺼냈다. 우리가 학생운동의 막을 내린 세대가 되리라 다른 K가 언급하였다. 2002년에는 열심히 여기저기를 쏘다녔던 친구들 중 몇은 고시생이 되었다.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는 어떤 선배의 소식은 조금 놀라웠지만 그리 씁쓸하지는 않았다. 정대화 교수를 돕던 친구들도 이제는 완전히 결별한 모양이었다. 취업, 대학원, 고시. 이십대 중반 청년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저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학을 떠난 선배가 귀국할 즘에 다시 이런 자리가 있다면 그날 모인 사람들은 이날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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