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學徒의 貧困

이번 학기에는 다섯 과목을 듣는데 중간고사를 하나도 치르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까지 서양법제사 보고서를 하나 써내야 했을 뿐이었다. 서양법제사는 본래 게르만법을 가르치는 과목이었는데, 서양법제사와 로마법을 모두 김기창 교수님이 전담하시면서 로마법 2로 강의하고 계신다. 보고서 주제는 ‘actio empti에 대해 설명함’이었는데 문헌을 뒤져보니 로마법 1을 듣지 않은 탓에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조규창 선생님이 쓰신 교과서를 며칠 동안 통독해서 로마법을 개관하고 다시 문헌을 조사했다. 국문으로 작성된 논문은 찾을 수 없었고 곽윤직이 대표편집한 민법주해와 양창수의 민법연구에서 관련된 글을 몇 개 찾아냈다. 표절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시기에 내용을 온전히 소화한 상태에서 글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문헌을 정독하면서 보고서 작성에 인용할 만한 구절을 머릿속에 대충 세운 논지 순서대로 전부 공책에 옮기고 일일이 쪽수를 적었다. 그 작업이 끝나자 문헌은 제쳐놓고 공책만 보고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남의 글을 단순하게 짜깁지 않은 A4 용지 3매 분량의 ‘보고서’를 쓰는 데 엿새가 걸렸다.

로마법을 배우니 민법의 뿌리가 보인다. 이번 과제를 하면서 소위 담보책임의 본질을 둘러싼 법정책임설과 채무불이행설의 대립이 얼마나 뜬금없는 맥락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이 땅에 던져진 법을 완결된 체계로 여긴 채 펼쳐지는 해석론이 어찌나 조악해 보이던지. 이천 년 전에 정리된 법리가 현행법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점이 참으로 많다 보니, 중세를 근대로 이행시킨 3R의 하나로 로마법 계수를 꼽는 이유를 세밀하게 느끼고 있다.

로마법이 근대법의 원형을 보여준다면, 비교법은 법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많은 학자가 유학 다녀온 덕에 간접적으로라도 접할 기회가 많은 독일은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제외하고, 불란서와 영국 및 미국 법제도를 개관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실정법해석론보다 무척 흥미롭다. 특히 재판제도 운용법은 거시비교만 해보아도 한국에서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게 된다. 조규창 선생님의 연륜에서 비롯하는 거침 없는 언사를 듣는 일도 퍽 즐겁다.

“이혼 의사가 합치된다고 숙려기간도 없이 합의이혼을 그냥 인정하는 게 말이 되냐? 부부가 치고받고 싸우다가 이혼하자고 도장 찍을 때는 심신상실상태이지 않은가.”
“매매 담보책임 규정을 임대차랑 도급에도 준용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같어? 하여튼 우리 민법은 병신같이 만들어놔서 도대체 연구하고 싶지가 않아.”
“자네들은 종교가 없나? 그러면 안 되지. 서양문화를 이해하려면 기독교를 잘 알아야해. 나는 김일수 교수처럼 광신도는 아니지만.”

법철학 시간마다 발제를 맡은 학생들이 평소에 얼마나 토론을 해보지 않았는지를 체감한다. 법사상사는 박물관으로 보내자는 이상돈 교수가 법철학 수업을 여러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리는 까닭은 현실 법문제에서 철학하는 태도를 함양하고자 하는 데 있다. 나와 지인 두 명은 어찌하다 보니 첫 시간에 발표했는데 주제는 법과 도덕이었다. “도덕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인가?” 이런 추상적인 논제를 던지면 학부생 수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철저히 구체적인 문제를 다뤘다. 간통죄를 존속시키고 이혼에서 파탄주의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며 동성혼을 금지하고 있는 결혼제도는 핵심도덕을 수호한다기보다 특정한 윤리를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각각의 쟁점별로 자료를 제시하고 찬반이 나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학기의 절반이 지났지만 발제자가 준비해 온대로 토론이 진행된 적은 우리가 준비한 주제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이런 식이었다. “법경제학에서 법학이 경제학의 침범을 어디까지 법학이 용인할 것인가?”, “법과 권력이나 자본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방안으로 어떠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전통법과 전문법이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존엄한가?” 세미나 경험이 부족하니까 논제를 선정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면 실제 사회 현상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법률해석론에만 골몰하는 학생들이 법조인이 되면 ‘대통령과 검사의 대화’에 등장한 교양 없는 인간이 된다고 확신하지만, 어쩌겠는가. 쉰소리를 늘어놓아 봤자 시험에 합격한 그들은 한없이 위대할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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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眠

머리가 여물려면 한참 멀었다. 나는 다르리라 앙양된 마음을 겨우내 생활에서 실없이 드러냈고, 내년 2월에는 유효기간이 만료될 토익 점수를 새로 마련하려 지난달 토익 고사장에 들어가야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열람실에서 낯이 익은 어린 친구들이 2차 시험 교재를 들고 교정을 오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새로 산 새하얀 민법강의가 부끄러워 칸막이가 없는 책상에 앉지 못한다. 쓸모없는 자의식을 무너뜨리고 질시로 무장한 속물이 아니 되고서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고상한 놈이 될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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