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生獸
1.
지난주 어느 날, 귀가하니 거실 TV에 어떤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보통 동생이 토크쇼를 보고 있기 마련인데, 베이징 올림픽 중계 때문에 방영 시간이 미루어진 듯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돈 잘 버는 남자 사업가가 유명 여배우와 이혼 소송을 벌이는 줄거리였다. 이어지는 법정 장면에서 나는 경악했다. 온갖 기자들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작가는 최근 간통죄 위헌제청신청을 했던 여인의 재판을 다룬 연예정보 프로그램도 보지 못했나? 가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라, 취재진이 법정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던데.
판사가 읽은 판결주문도 가관이었다. 이혼하려는 부부가 혼인 전에 만약 앞으로 이혼하게 된다면 남자 재산을 떼주기로 한 부부재산계약을 맺었다면서, 그걸 근거로 공유물 가운데 500억을 분할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활용되지 않는 대표적인 민법제도라 할 수 있는 부부재산계약을 어디서 찾았는지 용하기는 하다만, 아쉽게도 이 제도는 혼인 관계가 아무런 문제 없는 동안 부부가 취득하는 재산에 관하여 법에서 정한 부부별산제와 다른 내용으로 규율할 수 있도록 사적자치의 영역을 가족법에서 넓혀 놓았을 뿐이다. 이혼 시 재산분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편이 재산을 취득한 과정에 아내가 기여한 바가 있어야 남편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 가운데 아내가 제 몫을 주장할 수 있는 법인데, 그저 부부재산계약을 들먹이며 재산을 뜯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어지는 상황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패소한 남자가 대표로 있는 법인이 무슨 자산운용회사인 듯했는데, 판결 보도가 나가자마자 투자자들이 돈 내놓으라면서 들이닥쳤다. 펀드런이라는 친절한 자막까지 뜨면서. 박현주가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 500억을 물게 되었다고 미래에셋에 돈 맡긴 사람들이 자금을 회수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개인과 법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작가라고 볼 수밖에.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경영학 강사가 가르치는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제도에 대한 이해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법학개론 같은 쓸데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찬 책 말고, 근대 법학에 대한 교양을 함양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2.
일곱 번째 학기 성적을 확인하고 꽤 오랫동안 우울했다. 교재를 읽고 외워서 답안지에 쏟아내는 능력이 그리 출중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단순암기능력은 비슷한 수험능력을 지닌 집단 가운데 잘해봐야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준비하는 시험에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수험생은 압류와 가압류가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고 관련 판례를 암기한다. 그러고도 2차 시험까지 붙을 수 있는 시험이다. 나는 그게 되지 않는다. 외워야 할 까닭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한다.
책을 펼치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를 낑낑대며 머릿속에 구겨 넣는 작업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시험이 끝나면 밑 빠진 독에 채웠던 물처럼 빠져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체화되는 지식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공부를 하며 살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심리적으로 금지된 욕망을 갈구하는 짓에 불과할 뿐이다. 나처럼 나태한 놈은 공부가 주업이 되면 또 도망치고 말 것이다.
3.
이동통신사와 맺었던 계약을 해지했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생활에 심대한 지장이 생기고, 직접 버는 돈으로 이용료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다. 연락할 일이 있는 지인들은 이곳 우측 최상단에 있는 게시물 말미에 첨부된 전자우편주소를 활용해 주시길. 여기까지 올 생각이 없는 사람들과는 교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