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講義

다섯 시에 비교법입문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세 시부터 시작한 최장집의 마지막 학부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 큰 강당이 빼곡하게 찰 만큼 사람이 많았던 탓에 강의 자료를 챙기지 못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 잠깐 얻어 보았는데, 자신이 직접 설명한 학문적 배경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독일 관념론에 대한 언급이 의외였다. 또 자신은 실질적 민주주의론자가 아니라는 언급도 눈에 띄었다.

결론에서 한국 대학은 외형적인 면은 서구 대학과 비견할 만큼 좋아졌지만, 여전히 영혼이 없다고 비판했다.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 이 꼴이라 사회 전체가 낙후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개강, 휴강, 종강으로 점철되었던 자신의 학부 시절을 회상하면서 요즘 학부생들에게 차마 무엇인가를 요구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다만 영어 말고 유럽어 하나, 동아시아어 하나를 더 익혀두라는 정도. 언젠가 독일어와 일본어를 독해 가능한 수준까지 익혀 보아야겠다는 결심이 강화되었다. 결국 좋은 정당과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장래에 법학에서 절차주의가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되리라는 예측과 호응 되는 측면이 많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학자가 될 수 있다면, 절차주의에서 자본과 권력이 절차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구조를 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은데.

예전 세미나 모임 사람들을 만나 밥과 술을 먹고 귀가했다. 또래 중에 아직도 학부생인 놈은 이제 나밖에 없는 듯. 한 친구는 프레시안 기자가 되었다고 하고, 한 선배는 mbn에 취직했다고 한다. 곧 NYU로 나간다는 선배 소식도 들었고. 그러고 보면 거기서 알게 된 어떤 선배가 모 일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다른 경로를 통해 최근에 듣기도 했다. 그건 좀 충격이었다. 예전에 거기 입사했다고 들은 선배와는 달리, 당 활동에도 굉장히 적극적이었는데.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사실과 사건이 개입했겠지.

오랜만에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난 덕인지,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착상이 떠올랐다. 근대민법의 근본원칙은 인격 동등, 소유권 절대, 계약 자유, 과실 책임으로 정리된다. 이 원칙이 각각 무엇을 타파하려고 등장했는지 파악해야 개념이 쉽게 잡힌다. 근대 자연법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법적으로 고민한 끝에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인격이 동등하다는 의미는 독자적인 인격이 인정되지 않았던 노예나 농노 제도를 철폐한다는 것이고, 소유권이 절대적이라는 의미는 재산에 붙어 있던 각종 관습적인 권리를 일소한다는 것이다. 근대법은 길드 등에 얽매여 있었던 상인에게 계약을 자유롭게 맺을 수 있게끔 하였고, 이제 개인은 자기가 잘못한 만큼만 책임질 뿐 연좌제에 묶이지 않게 되었다.

좋은 말로 포장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시민 계급을 위한 원칙이다. 부르주아를 번역하면 시민이고, 시민법은 유산계급에 적용할 목적으로 제정되었지 투표권도 없는 노동자에게까지 적용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고용에 관한 규정이 단순하기 그지없고,  신분제 폐지도 공장 노동자 수급을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일종의 이념형이다. 실제로 이 원칙들이 자본주의 발달에 얼마나 기여하였을까?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자산 보유 형태가 이미 유사하였다. 지주가 자본가의 적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느 시절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인가? 또 장하준은 자유방임주의가 자본주의 성장에 필수적이기는커녕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실증하였다. 자유무역이 영국에서 실제 정책으로 펼쳐지기 바로 전까지 구빈법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을 통하여 한반도에 근대법이 계수되면서 각각의 원칙들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도 살펴볼 필요도 있다. 조선의 신분 제도 폐지는 근대법 계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의용민법 시행으로 사라진 조선의 관습권은 무엇이며, 사회경제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과실책임의 원칙은 얼마나 엄격하게 준수되었는가? 대한민국 성립 후 이 원칙들의 작동 방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전통 지주 계급은 근대법 시행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였으며, 한국에서 자본 축적에 근대법 원칙들은 이바지한 바가 있는가?

경제이념으로서 자유주의가 후대에  강조된 측면이 강하다면, 법이념으로서 자유주의에도 비슷한 비판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소유적 자유주의 아래 다시 소유권 절대를 주장하는 입장의 기반을 크게 흔들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저작권 침해 행위를 배타적 소유권에 입각하여 마냥 강력하게 규율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도 찾을 수 있을 테고.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서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P2P나 웹 하드를 통해 자료를 공유하려 드는 족속의 심리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밑바탕에는 호혜의 원리와 인정 욕구가 존재한다. 오늘날 많은 임금노동자가 영세자본가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소유 제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아, 그런데 이제부터는 지하철에서도 사례연습집을 읽을 계획이니….

6 Comments »

  1. 유키 said,

    June 21st, 2008 at 9:09 pm

    지하철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엔 뭔가 아쉽긴 해요(…….);
    버스처럼 흔들리지도 않고, 기차처럼 레일이 끊겨있는 것도 아니라서 덜컹거리지도
    않으니 책읽기가 좋고, 게다가 좌석이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어서 눈시선 처리하긴
    책만한 게 없으니까요. ~_~

    ps. 오랜만에 대항해시대 이야기. 헬리오스 서버 유해자정능력을 상실한 듯해요 ~_~;
    군인들이랑 유해들이 리스본에서 주사위모의전(서로 돈 걸고 모의전으로
    하는데, 그게 좀 대규모화된 거라고 들은)을 열심히 하다보니…

    안전해역마저 유해에 대한 패널티 같은 게 사라져버린데다, (안전해역에서
    모의전하는 유해 토벌했다고 유해들이 항의하고 -_-; 오히려 토벌한 쪽의
    여론이 밀리면서 더 안 좋은 상황. =_=;)

    일반유저에겐 군인이 유해랑 같이 리스본에서 놀다보니 그 놈이 그 놈같이
    보이는 효과도 있고, 모의전한다고 군인들의 토벌이 줄어든 데다,

    게다가 유해랑 친해진 군인들은 토벌을 꺼리는 것도 있고,
    모의전같은 대회에 참가하는데 해적짓을 하는 쪽이 오히려 경험이 많아서
    유리한 데에 비해, 염색 패널티는 헬리오스 서버 특성상
    셀레네에 비할 바가 못되니..(거긴 사략마저 인정하니까요)

    유해수가 꽤 늘어나 버려서, 일반유저 수가 확 줄어버린 모양이에요.

    방학을 맞이하여 새로 시작하는 분들에게 헬리오스서버는 오지말라고
    게시글이 꽤 되는…;ㅁ;

    암튼…이리스를 잡아먹고(?) 약간혼잡까지 띄운 헬리오스의 몰락이랄까 ( –);
    방학이 되면 확실히 윤곽이 잡히겠지만 현재로선 지나친 유해플레이 옹호가
    몰락을 가져온 것 같네요. (덕분에 셀레네는 사람이 조금 늘어났다고 하네요)

  2. 永革 said,

    June 22nd, 2008 at 12:37 pm

    평일에는 지하철에서만 수험서 말고 다른 책을 읽어왔는데, 이젠 이 즐거움도 버릴려구요. 일단은 수험에 간접적으로 도움될 만한 서적을 읽을 생각입니다.

    대온은 꽤 오랫동안 정보 얻는 걸 멈췄더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 울티마 온라인의 경우 PK를 강하게 제약하면서 게임이 망쳐졌다고 보는 분들도 있던데, 헬리오스 서버의 경우 그 반대가 되겠군요. 적어도 유럽 근처 해역에 오면 현상범들은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지.. 개인적으로 PK를 좋아하지 않다보니, 아예 PK 시스템이 없는 게임에 호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3. 술이 said,

    June 23rd, 2008 at 1:32 pm

    오랜만의 글이군요! 최장집 선생님 은퇴소식을 듣고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근데 정당정치가 살아나야 한다는 선생님 얘기를 ‘이제 촛불을 꺼야 한다’는 논거로 활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황스럽더군요;;

  4. 永革 said,

    June 23rd, 2008 at 1:45 pm

    입사하자마자 큰일이 터져서 몸이 남아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집회 중에 근무하시는 곳 앞을 지나가다가 술이부작님 생각이 나더군요. ^^;

    거리에서 벌이는 운동의 정치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제도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어떻게 촛불을 꺼야 한다는 말로 둔갑하는 것일까요. 대의제를 넘어서자는 반박이라면 경청할만하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은 정말 일반적으로 독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5. said,

    June 30th, 2008 at 12:29 am

    안녕하세요^^ 싸이 불 눌러봤다 도착했어요ㅎㅎ
    게임..음..예전에 문명이랑 대항해시대 했었는데ㅎㅎ지금은 심시티4 가끔 해요
    농업도시 완성-_-;;ㅋ

  6. 永革 said,

    July 1st, 2008 at 12:16 am

    앗, 안녕하세요! 그날 인사 나눌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ㅎㅎ

    사실 제 취미는 전자오락인지라.. -_-; 문명 시리즈는 제 인생의 게임 중에 하나죠! :-) 아마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시리즈만 고르라고 하면 후보군에 오를 작품입니다. 심시티는 2000 이후로 손을 못 댔군요. 경영 시뮬레이션 쪽은 이상하게 재주가 없어서 운영을 잘 할 수가 없더라구요.

    여튼 저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해서 다시 세미나 나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모쪼록 제가 그곳에서 많이 배웠던 것처럼 빛님도 자기 성장의 기회로 잘 삼으셨으면 합니다. 다음에 언젠가 또 만나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바닥이 워낙 좁은 동네인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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