切齒腐心

1.

국가를 자신이 속한 계급의 집행위원회로 부리는 ‘人’을 元首로 선출한 나라에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까닭을 모르는 앵무새 무리가 어쨌거나 폭력은 나쁘다고 옹알이는 꼴이 진귀하지는 않았다. 용산에서 사람 다섯이 자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법절차의 원칙이니 비례의 원칙이니 하는 올곧은 말들을 장님처럼 더듬어 보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름다워서 무서웠다. 어떻게 일어난 영문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이 충동을 이겨내야 합격할 수 있다고 최면을 걸었다. 어느 생각이 魔軍인지 모를 일이었다.

행정법은 경찰법에서 비롯하였다. 법으로 국가의 경찰력 행사를 제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상법만큼 사람이 몰리는 전공은 행정법이다. 재건축 규제에 해박하면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아득한 망각과 각광의 간극에 행정법의 기원과 현재를 동시에 아우르는 잿더미가 들어앉았다. 누가 지어낸 사례도 이보다 무참하거나 광막하지 않다. 이래저래 교과서는 현실 앞에 초라하다. 이제 그냥 이런 주제 앞에서는 “보상을 받았으니 진압은 정당했다.”라고 써야 하지는 않을까. 국민이 법을 지키는 게 법치라면서, 소크라테스가 호명되는 나라에서는….

2.

여름 시험장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데 다시 실패했다. 당연한 결과다. 준비에 몰입한 기간부터 짧았다. 민법 교재를 한 번 읽느니 마느니 하다가 9월을 맞이했다.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 두 달 동안 매일 오전 여덟 시부터 열한 시까지 책상에 붙어 있었고 오가는 지하철에서 최신판례와 조문을 읽었지만, 이 기간에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붙을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시험 당일이 임박한 시점에 확인하지 않았던 내용은 시험장에서 맞닥뜨리면 찰나 동안 정확하게 可否를 판단할 수 없다. 공들여 읽어둔 교재가 없어서 문제 푸는 연습만 되풀이한 탓에 마지막에 정리한 내용의 폭이 좁았다. 양을 줄여나간다는 말에 사로잡혀, 문제를 풀면서 틀린 부분만 반복해서 들춰본 게 실책이었다. 최후의 일주일 동안 출제 가능한 내용을 모두 읽어두어야 한다.

다시 내년 1차 시험을 준비한다. 한 해를 오롯하게 바치고도 낙방하거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수험에 열중하지 못한다면 이 시험에 합격할 자질이 없는 것이다.

3.

나는 LSD 중독자이다. 게으르고(lazy), 성긴 논리로 자신을 비호하며(sophistic), 번다한 주제에 대해 관심만 많다(dilettante). 이것들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 ‘일’에 매진하는 삶을 지속해야 한다. 시간을 살해하는 데 탐닉하지 않고, 건조한 일과를 경작하는 일은 체제에 투항하는 짓과 무관하다.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는 착각은 자존의 근거가 아니라 오만의 증거이다. 태만의 대가를 한탄하거나 타인을 조롱하며 위안을 얻으면 안 된다.

여력이 있으면, 정의와 형평을 궁리하기 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부터 읽을 노릇이다. 문화연구를 배워서 전자오락 비평을 해보겠다거나, 특정 세부 전공 분야를 골라 최신의 이론을 세워보겠다는 종류의 망상은 깨끗하게 버리자.

8 Comments »

  1. 유키 said,

    March 4th, 2009 at 7:02 pm

    합격할 자질은 이미 가지고 계세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파악하고 반성한 후, 그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이미 움직이고 계시잖아요? 말은 쉬워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적어요. 올 1년 동안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내년에는 2차까지 단번에 합격하셔서 좋은 판사님이 되어주시길~!

  2. 永革 said,

    March 4th, 2009 at 10:27 pm

    저는 입만 산 놈이어서, 뱉은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네요. 내년 이 맘때가 되면 자연스레 증명될 테죠…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설사 시험을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 하더라도 ‘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랍니다. 게다가 처음 1차를 붙은 사람 중에서 단번에 2차를 합격하는 사람은 해마다 배출되는 합격자 천 명 가운데 오십 명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바닥에서 지극히 평범한 종자입니다. 만약 최종 합격을 한다 해도 제 수험기간은 평균 수치인 5년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시험에 처음 덤빌 때에는 누구나 자신에게 통계를 격파할 비범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범상한 인간은 이 점을 빨리 깨달아야 덜 비참해지는 것 같네요.

    오늘 어떤 이의 블로그를 훔쳐보다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스스로에게 항상 다짐하는 것이지만 수험생활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딱히 격려받을 일도 아니다. 그걸 일찍 깨닫는 사람만이 단시간에 이 바닥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이다.”

    저는 이제 겨우 깨달은 느낌입니다. 앞으로 더 이상 수험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

  3. 고어핀드 said,

    March 25th, 2009 at 1:22 am

    어제 다른 블로그에서 뵈었는데, 요즘 별고 없으시죠? :)

    상대를 대화가 아니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사람과 대화를 해봐야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름 예리한 통찰을 가진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엔 모자란 사람도 있죠. 그런 소소한 데 마음 쓰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_^;

  4. 그대 오르는 언덕 said,

    March 27th, 2009 at 12:28 am

    트랙백 통해 들어 왔는데 느낌이 좋네요. 인문학은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읽어가다 여기저기도 둘러 봤네요. 제대로 모든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님의 글들에 공감가는 부분도 있네요.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 사회에 대한 관심(?!) 을 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님의 능력에 감탄하며 한 수 배웁니다.

    시험은 다르지만 같은 수험생의 입장에서 비루한 일상에 큰 환기가 될 블로그의 발견이네요. 종종 들리며 흔적 남기렵니다.

  5. 永革 said,

    March 27th, 2009 at 6:33 pm

    고어핀드 / 어랏, 여기 댓글을 남겨주셨었군요. 고어핀드님 방명록만 몇 번 들어가보고 있었습니다. ㅎㅎ(그런데 저 고어핀드님 방명록 비밀로 안 남긴 건가요? -.-;)

    흔치 않은 옛 동지(?)를 발견한 마음에 몇 마디 주절거리고 말았는데, 크게 신경 안 씁니다. ^^; 어차피 댓글 몇 개로 사람 마음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그냥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명예훼손죄도 있으니 설마 목수정이 사실 관계가 잘못된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는데, 그 글에서 언급되었던 것과 다르게 바스티유 노조가 정명훈을 위해 연대 투쟁한 적은 없었다는 기사를 보니 좀 당황스럽네요. 정 씨에 대해서도 크게 실망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자기 가치에 충실한 사람일 뿐인 듯하네요.

    그대 오르는 언덕 / 와, 반갑습니다. 새로운 방문객께서 흔적을 남겨주신 게 얼마만인지. :-) 비루한 일상이라는 표현에 가슴이 살짝 아립니다. 비록 한 달에 한 번 새글이 올라올까 말까한 블로그입니다만, 코멘트 남겨주시면 제 일상도 환기될 성 싶습니다. 모쪼록 수험에 열중하는 생활되시길 바랄게요.

  6. pass said,

    April 4th, 2009 at 2:07 am

    공부는 잘되가니. 나는 민법도 보고 형법도 보고, 판례읽고 평석도 해야하고, 사례도 매주 풀어야 하고, 중간고사도 봐야하고, 걍 바빠. 그나저나 법률저널 로스쿨신문에 내가 쓴 기사 나온다. 잘 찾아봐.ㅋㅋㅋ

  7. 永革 said,

    April 4th, 2009 at 2:13 pm

    삼월 동안 그렇게 진도를 많이 빼지는 못했고, 매일 아침 여덟 시까지 나오는 습관 유지하려 노력한 데 의의를 두려 합니다; 많이 바쁘신 듯해서 어디 놀러 가볼 상황이 아니네요. ㅎㅎ 법저 한 번 들어가볼게요!

  8. 상현 said,

    April 21st, 2009 at 2:29 pm

    덕봉군 메일을 보냈으니 확인 좀 해주시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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