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Sisyphus, Franz Von Stuck, 1920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호메로스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강도였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옥에서 무용한 노동을 하도록 벌받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대함에 있어서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기나는 주피터에게 납치되었다. 딸의 실종에 놀란 그의 아버지는 시지프에게 사정했다. 이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어준다면 아조프에게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하느의 노여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물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호메로스는 또한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로 묶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플루톤은 텅 비고 조용하기만 한 그의 왕국의 정경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을 승리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시지프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경솔하게도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명하기를, 자신의 시체를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내다버리라고 했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인간적 사랑을 저버린 채 시킨 대로 복종한 아내에게 분격한 나머지 시지프는 아내를 벌하려고 플루톤에게 지상으로 되돌아가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습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지옥의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둥글게 굽은 만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미소짓는 대지를 눈앞에 보며 살았다. 이렇게 되자 신들의 판결이 불가피했다. 메르쿠리우스가 와서 이 뻔뻔스러운 자의 목더미를 욺켜잡아 그를 쾌락에서 끌어낸 다음 굴려 울릴 바위가 준비된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우리는 이미 시지프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의 열정뿐만 아니라 그의 고뇌로 인하여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지옥에서의 시지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진 것이 없다. 신화란 상상력으로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으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에 있어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올려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날들에 시지프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지만 그는 또한 기뻐하면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바위로 되돌아가는 시지프를 상상해본다. 그것은 고통으로써 시작되었다. 대지의 영상이 너무나도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의 부름이 너무나도 강렬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 슬픔이 고개를 쳐들게 마련이다. 그 슬픔은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이다. 엄청난 비탄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무겁다. 이것은 우리들이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들이다. 그러나 거역할 길 없는 진리들도 인식됨으로써 사멸한다. 이렇듯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지만 자기를 이 세상에 비끄러매어놓는 유일한 끈은 한 처녀의 싱싱한 손이라는 것을 안다. 이때 기가 막한 한 마디 말소리가 울린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에 의하여 판단하노니 만사가 다 잘되었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의 승리를 표현한다. 고대의 예지가 현대의 영웅주의와 만난다.

부조리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라구! 이처럼 좁은 길들을 통해서‥‥‥?” 그러나 존재하는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행복은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내가 판단하노니 만사가 다 잘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또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다 소진되는 것은 아니며 또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불만과 무용한 고통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들어온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그 한 마디는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代價)이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어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은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하나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알베르 카뮈 作 <시지프 신화>(1942) 中 마지막 부분  (김화영 譯, 1997, 책세상)